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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소식] [손동우가 만난 사람]스리쿠션 당구 세계랭킹 2위 김경률
작성일 : 11-03-11 10:10

[손동우가 만난 사람]스리쿠션 당구 세계랭킹 2위 김경률

ㆍ“측정 불가능한 고수들의 싸움, 당구는 ‘비워야 ’이깁니다”

1970~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의 상당수는 당구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다. 마음껏 기른 장발을 휘날리며 비스듬히 담배를 꼬나문 채 녹색 테이블 위로 빨간 공에 흰 공을 맞췄을 때의 통쾌함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한 젓가락 감아 올리던, 약간 퉁퉁하게 불은 면발의 자장면은 또 얼마나 기막히게 맛있었던가. 게임비 내기당구에서 이긴 뒤 ‘아줌마(아저씨), 났어요!’를 외칠 때도 짜릿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시절 당구장은 동네 불량배와 건달, 교복단추를 풀어헤친 껄렁한 고교생들이 모여들어 돈내기를 일삼는 어둠의 공간이기도 했다. 당연히 욕설이 난무하고, 사소한 시비 끝에 큐를 휘두르며 치고받는 패싸움이 심심찮게 벌어지곤 했다. 입구에는 ‘미성년자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으나 그야말로 형식일 뿐이었다. 지금도 조폭영화에서 당구장의 풍경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994년 당구장의 문호가 청소년에게 공식적으로 개방된 이후 ‘당구도 엄연한 스포츠’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부정적 일변도의 인식도 다소 바뀌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우연히 당구장에 들렀던 중학교 3학년 시골 소년이 있었다. 첫눈에 당구에 반한 소년은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당구만 생각하고, 당구만 쳤다. 공부는 물론 뒷전이었다. 그 소년은 뒷날 세계 정상급 당구선수로 성장했다. 지난달 21일 터키 안탈리아에서 열린 ‘터키 스리쿠션 당구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 랭킹 2위에 오른 김경률 선수(31·서울당구연맹)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지난해 이 대회에서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정상에 우뚝 선 바 있다. 오는 5월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세계랭킹 1위 등극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김경률을 만나 그의 당구 인생에 얽힌 얘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그의 훈련장인 서울 강남구 역삼동 ‘Y캐롬 클럽’에서 진행됐다. 당구는 포켓볼·스누커 등 테이블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게임방식과 구멍이 없는 ‘캐롬’으로 나뉜다. ‘캐롬’은 다시 스리쿠션과 일반인들이 많이 치는 4구로 분류되는데 지금은 ‘국제규격의 스리쿠션’으로 통용된다.





지난달 21일 터키에서 열린 세계 스리쿠션 당구월드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해 한국선수 최초로 세계 랭킹 2위에 오른 김경률 선수가 서울 역삼동 ‘Y캐롬 클럽’에서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 그는 “당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완전히 씻어내고 당구를 건전한 스포츠로 뿌리내리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이번 대회에서 김경률은 세계랭킹 1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준우승으로 랭킹 포인트 54점을 얻어 누적 포인트 406점이 됐는데 이는 세계랭킹 1위인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의 413점에 불과 7점 모자라는 것이다. 만일 결승에서 에디 먹스(벨기에)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더라면 우승 포인트 80점으로 여유있게 세계 정상에 등극할 뻔했다. 더욱이 에디 먹스는 김경률보다 랭킹도 낮은 데다 평소 김경률에 완패했기 때문에 더욱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승부는 역시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에디 먹스는 결승전에서 애버리지 3.0을 기록하는 등 과거의 플레이와는 전혀 다른 신들린 듯한 기량을 선보이며 김경률을 세트스코어 3-0으로 눌렀다. 김경률은 결국 대회 2연패에 실패하면서 랭킹 1위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는 “당구도 사람이 하는 것이라 약간의 운도 작용한다”면서 “그러나 그 운이라는 것도 실력이 있을 때 찾아온다는 점에서 결과에 무조건 승복한다”고 말했다.

김경률이 세계당구의 최고수 반열에 오르며 국내외 당구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지난해 2월 터키 월드컵에서였다. 당시 세계랭킹 6위였던 김경률은 결승에서 ‘숙명의 라이벌’ 야스퍼스를 만나 치열한 접전 끝에 세트스코어 3-2로 꺾고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날 결승전은 경기장 가득히 새파란 불꽃이 튀고 뇌성벽력이 몰아치는, 그야말로 건곤일척의 대회전이었다. 첫 세트를 먼저 내준 김경률은 2, 3세트를 내리 따내면서 경기를 뒤집었으나 4세트에서 일격을 당하면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운명의 마지막 5세트에서 그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마침내 당구에 입문한 지 16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올랐다. 김경률은 “2008년 10월 수원 월드컵 결승전에서 야스퍼스에게 패배해 2위에 머물렀던 아쉬움을 되갚은 경기여서 더욱 기뻤다”고 말했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현지 관중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내며 새 챔피언의 탄생을 축하했다. 관중은 또 김경률에게 다가와 “당신이 내 마음 속의 챔피언”이라고 소리치면서 사인공세를 퍼붓기도 했다. 김경률은 “터키는 우리나라와 정서적으로 가까운 나라인 데다 당구장 사정도 우리와 비슷해서인지 더욱 친밀감을 보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결승전에서 애버리지 1.621을 기록했다. 애버리지는 1이닝(한번 큐를 잡고 실패할 때까지 치는 것)당 기록하는 점수를 뜻하는데 세계정상급 선수의 애버리지는 1.7 안팎이며, 아마추어 최고수는 1.0 정도라고 한다.

김경률의 승리는 여러모로 의미있는 것이었다. 우선 한국인 최초의 월드컵 우승자였다는 점이다. ‘당구의 전설’로 통했던 이상천 전 대한당구연맹 회장(1954~2004)이 1992년 우승한 적이 있으나 당시 그는 미국시민권자였다. 또 김경률의 우승으로 야스퍼스,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 토브욘 브롬달(스웨덴), 다니엘 산체스(스페인) 등으로 형성된 이른바 ‘4대천왕’ 체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 4대천왕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1년에 6회 정도 열리는 각국 월드컵에서 자기들끼리 1~4위를 하는 등 막강한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김경률은 “한꺼번에 10점씩을 치는 등의 저돌적인 플레이로 인해 해외 언론으로부터 ‘코뿔소’ ‘킴콩(Kim Kong)’ 등의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대회를 통해서였다”고 말했다.

김경률은 시합이 없는 날에도 예외없이 하루 8~10시간의 강훈련을 하는 ‘연습벌레’로도 유명하다. 5월의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있는 만큼 최근에는 더욱 훈련강도를 높이고 있다. 자신의 장기인 ‘뒤돌려치기(속칭 우라마시)’ ‘빗겨치기(〃 기리카시)’ 등의 기술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가하면, 등산·오래달리기 등 지구력 훈련과 웨이트 트레이닝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또다른 장기인 스냅 샷도 매일 가다듬고 있다. 포켓볼은 공의 회전을 최소화해야 하지만 스리쿠션은 회전을 극대화하는 게 관건이다. 공의 회전이 많을수록 목적구에 맞는 순간 각이 커져 더 많은 ‘길’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김경률은 “공을 칠 때 회전을 많이 주는 스냅샷의 숙달은 정상급 스리쿠션 선수들에겐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185㎝, 95㎏의 거구임에도 순발력이 뛰어나며, 물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플레이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집중력 강화를 위해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등을 찾아가 ‘마인드 컨트롤 훈련’도 하고, 당구전문서적을 읽는 등 이론공부에도 힘을 쏟는다. 김경률은 “외국의 세계 정상급 선수들은 대부분 전담 코치를 두고 있지만 국내에는 아직 그런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서 “기술훈련을 하다가 잘 안되거나 의문이 생기면 국내 당구계 선배들을 직접 찾아 뵙고 도움말을 듣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경률이 유독 집중력 훈련에 강조점을 두는 것은 당구, 특히 스리쿠션은 사격이나 양궁처럼 1㎜의 오차로 승부가 결정나기 때문이다.

위기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은 채 오히려 창조적인 플레이를 펼치거나, 유리하다고 해서 자만하지 않으려면 평소에도 정신력 강화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는 “지나치게 승부에 몰입하거나 승리에 집착하면 오히려 평소의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다”며 “세계 최정상급의 선수들은 한마디로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2006년 도하, 2010년 광저우 등 두 차례의 아시안게임에서 모두 기대 밖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김경률은 “아시안 게임에서 반드시 금메달을 따겠다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몰아갔던 것이 오히려 패인이었다”며 “당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겸손함과 평상심의 마음가짐으로 공 하나하나를 대했을 때 대체로 성적이 좋았다”고 말했다.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김경률은 어려서부터 덩치가 커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씨름과 태권도를 했다. 양산중 3학년때인 94년 그는 친구와 함께 읍내 당구장에 갔다가 당구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소년의 눈에 비친 당구공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였다. 그는 “회전을 먹은 공이 순간적으로 멈췄다가 뒤로 쭉 빨려 되돌아오거나, 앞으로 힘차게 나가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오로지 학교와 당구장을 오가는 ‘모범적인’ 생활을 계속했다. 당연히 학교 성적은 꼴찌에서 1, 2등을 다퉈야 했으나 그럴수록 당구실력은 하루가 무섭게 늘어갔다. 큐를 잡은 지 한 달 만에 4구 점수가 100점을 넘었고, 석 달도 되지 않아 300점을 쳤으며, 고교 졸업 무렵에는 1000점을 넘어 ‘측정 불가능’의 고수가 됐다. 양산 일대에는 ‘덩치 큰 소년 당구 고수가 나왔다’는 소문이 쫙 퍼졌고, 당구장의 ‘형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하면서 은근히 어려워했다.

당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거짓말도 해야 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참고서와 학용품을 사야 했으며”,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의 음식배달을 하고 음식값 일부를 가로채야 했다. 이런 방법으로 교교 졸업 때까지 당구장에 쏟아부은 돈이 1000만원이 넘었다. 김경률은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은 내가 했던 짓을 그냥 모른 체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군 제대 직후인 2001년 11월 256명이 출전한 아마추어 동호인 대회인 ‘국민생활체육 스리쿠션 대회’에서 우승한 뒤 부상으로 받은 김치냉장고를 택배로 양산 집에 보냈다. 김경률은 “냉장고를 받아보신 부모님이 그제서야 ‘당구치는 아들’을 인정하셨으며, 이후 국내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열렬한 팬이자 후견인이 되셨다”고 말했다.

제대 직후 김경률은 한때 당구를 영영 포기하려 했다. 당구를 평생의 직업을 삼아야겠다는 각오도,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남대문시장에서 ‘골라, 골라!’를 외치는 행상 옷장사와 과자·음료수 배달 등 온갖 일을 했지만 벌이는 신통찮았다. 그때 경기 성남의 당구장에서 같이 생활했던 선배(서대열·41)가 “네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조언했다. 게다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스리쿠션 결승전에서 황득희 선수가 이상천 전 대한당구연맹회장을 이기고 금메달을 따는 것을 본 김경률은 당구에 인생을 걸기로 굳게 마음 먹었다.

고(故) 이상천은 김경률뿐만 아니라 당구깨나 친다는 사람들에게는 전설이자 우상이었다. 경기고·서울대를 졸업한 수재인 이상천은 전국당구대회에서 7차례나 우승을 차지했고, 87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에는 89년부터 2001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미국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이후 미국과 스리쿠션의 본고장인 유럽을 오가며 90년대 세계 최고수로 군림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상천을 가리켜 ‘스리쿠션계의 마이클 조던’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김경률은 이런 이상천과 맞대결을 펼쳐 1승1패를 기록했다. 2003년 여름 김경률은 국내대회에서 이상천과 맞붙어 30-15로 이겼다. 김경률은 “회장님(이상천)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던 존재였다”면서 “그런 분이 새카만 후배에게 지고도 진심으로 축하해주시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존경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같은 해 겨울 김경률은 접전 끝에 이상천에게 39-40으로 패배했다. 이상천은 그때도 김경률에게 “아무래도 네가 나를 연장자 대접을 한다고 봐 준 것 같다”며 후배를 칭찬하는 도량을 보였다고 한다. 김경률은 “그 분의 장점은 한번 친 공은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해내는 능력”이라며 “나도 그 같은 복기(復棋) 능력을 점차 익혀가고 있다”고 말했다.

“당구가 기쁨이자 인생 그 자체”인 김경률은 당연히 “여자보다 당구가 더 좋아서” 총각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2014년에 장가가면 좋다’는 어머니 말씀에 그때쯤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는 실력과 연륜을 쌓은 뒤 자신의 기술과 노하우를 당구동호인들에게 전수하기 위해 당구 아카데미를 개설하겠다는 웅대한 계획을 갖고 있다. 김경률은 “가칭 ‘김경률 당구 아카데미’를 통해 당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완전히 씻어내고 건전한 스포츠로 뿌리내리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구 세계 최고수를 찾아간 김에 평소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구력이 34년인데도 아직 다마수 200에서 맴돌고 있다’고 토로하면서 실력향상 비법을 묻자 김경률은 “아무리 취미라도 꾸준히 연습을 해야 하며 자신의 플레이를 늘 떠올리는 습성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경향신문 편집국에 500점의 아마추어 고수가 있으니 친선 또는 지도 경기를 갖는 게 어떠냐는 제안에 대해서는 “조만간 정동을 방문해 당구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겠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 임성우 창해그룹 회장 후원으로 마음놓고 당구에 전념

다른 스포츠 종목의 프로선수들에 비해 아직까지 국내 당구선수들의 처우는 열악한 편이다. 스리쿠션 당구 월드컵대회에서 우승하면 약 2000만원의 상금을 받는다.

여러 국가에서 돌아가면서 1년에 6번 개최되는 월드컵대회에서 두세 번 우승하면 4000만~6000만원을 손에 쥐게 되지만 현실적으로 몇 년에 한번 우승하는 것도 지극히 어렵다. 따라서 프로선수라고 하더라도 당구장을 경영하거나, 다른 생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김경률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당구 애호가이면서 에탄올 제조업체인 창해에탄올과 곡물·설비 수출입업체인 창해인터내셔널 등 5개 기업을 경영하는 임성우 창해그룹 회장을 든든한 후원자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임 회장은 평소 지인들로부터 “국가대표 선수들이 마음 놓고 훈련할 장소가 없다”는 말을 전해 듣고 2007년 9월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자신의 빌딩 한 층에 ‘Y캐롬 클럽’이라는 간판을 내건 뒤 이를 선수들에게 내놓았다. 국제 규격의 당구 테이블 4대가 설치된 이곳에는 국내 유일의 멤버십 당구 클럽으로서 개인 큐를 보관하는 라커가 갖춰져 있고 회원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테이블과 소파도 있다.

4구 500점에 스리쿠션 애버리지 1.0이라는 아마추어 최고수급 실력을 갖춘 임 회장은 ‘Y캐롬 클럽’ 개장 직후 선수들의 훈련모습을 눈여겨보다 김경률의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임 회장은 곧바로 그를 창해에탄올의 ‘특별사원’으로 채용한 뒤 생계 걱정 없이 운동에만 전념하게 해주었다. 김경률은 “운동을 그만둘까 고민하던 바로 그 무렵에 회장님을 만나게 됐다”면서 “당구를 스포츠로, 당구선수를 전문가로 인정해주시는 회장님 덕택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됐다”며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다.

업무가 끝난 뒤 다른 일정이 없으면 큐를 잡고 당구에 몰입하는 임 회장은 가끔씩 김경률과도 대결을 벌이는데 이때만큼은 팽팽한 ‘전투 모드’에 돌입한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 때문에 대체로 김경률이 이기기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서로 공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큐 제작업체인 한밭큐도 김경률을 후원하고 있다. 인터넷 중고 당구용품 매매 사이트에 찾아가면 ‘김경률 큐 60만원에 팝니다’ 등의 문구도 볼 수 있다.

◇ 김경률 약력

△ 1980년 경남 양산 출생
△ 양주중·언양농고 졸업
△ 2003년 SBS 왕중왕전 준우승
△ 2005년 SBS 왕중왕전 우승
△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동메달
△ 2006년 그리스 세계 스리쿠션 당구월드컵 3위
△ 2008년 수원 세계 스리쿠션 당구월드컵 준우승
△ 2010년 터키 세계 스리쿠션 당구월드컵 우승
△ 2011년 터키 세계 스리쿠션 당구월드컵 준우승

출처 : 경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