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 열기로 전 세계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가운데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요람인 태릉선수촌엔 오히려 적막감이 감돌았다. 산사를 연상시키는 고요함 속에는 날선 긴장감과 승부욕이 뒤엉켜 숨어 있었다. 바늘로 허공을 쿡 찌르면 팽팽한 긴장감이 툭하고 터질 듯 했고 각 훈련장에서 땀흘리는 태극전사의 눈빛은 신새벽을 깨우며 세상을 집어삼킬 듯 떠오르는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따사로움을 넘어 땀구멍을 자극하는 강한 햇살이 내리쬔 지난 11일. 태릉선수촌을 둘러봤다.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D-154일’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통해 청춘을 땀으로 불사르는 선수들의 도전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결전의 시간을 향해 째깍 째깍 움직이는 운명의 시계는 훈련 외엔 감히 그 어떤 곳에도 신경을 팔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갖게 했다.
김인건(66) 태릉선수촌장은 “밴쿠버동계올림픽의 성공이 큰 자극제가 된 것 같다”면서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을 목표로 땀 흘리는 선수들도 동계종목 선수에 못지 않게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태릉선수촌의 분위기를 전했다. 김 촌장이 전한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기 위해 태릉선수촌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태극전사들의 땀의 현장을 지켜봤다. 5개월 뒤 이들이 쏟아낸 굵은 땀방울이 국민에게 꿈과 용기를 안겨주는 금메달의 꽃으로 활짝 피어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샘솟았다.

◇공포의 불암산 크로스 컨트리
운동장 동쪽 샛길에서 출발해 불암산 정상 헬기장까지 왕복 8.2㎞ 거리.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는 선수들에겐 가장 끔찍한 트레이닝으로 꼽히는 불암산 크로스 컨트리 훈련이다. 매주 금요일 오후 2시 실시한다. 기자가 찾은 이날은 공교롭게도 금요일. 복싱과 남자 핸드볼 선수들이 불암산 크로스 컨트리에 나서 자신과 싸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복싱 웰터급(69㎏급) 전영남은 “지구력이 중요한 복싱에서 크로스 컨트리는 큰 도움이 된다”면서 “숨이 턱 밑에 차는 게 아니라 숫제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라고 훈련의 강도를 설명했다. 복싱선수는 종목적 특성상 불암산 크로스 컨트리 훈련의 최강자로 꼽힌다. 선수촌 내 상위권 선수들이 대개 24분 정도에 왕복 주파하는 가운데 과거 복싱의 문성길이 21분대를 찍어 아직도 깨지지 않는 ‘불암산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불암산 크로스 컨트리의 마지막 급경사 코스는 숨이 턱밑에까지 차오르기 때문에 ‘깔딱 고개’로 불린다.

◇당구의 역사적인 태릉 훈련
당구는 지난 3일 역사적인 날을 맞았다. 당구 사상 최초로 태릉선수촌에 입촌해 광저우아시안게임에 대비한 훈련을 시작했기 때문이다.아시안게임 정식종목이지만 그 동안 비올림픽 종목이라는 이유로 촌외훈련으로 설움을 곱씹었던 당구대표팀 이장수 감독은 “한국 당구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쾌거”라면서 “입촌 훈련을 해보니 경쟁심이 생기는 것은 물론 목표의식도 더욱 뚜렷해진다”고 뿌듯해했다. 남녀 10개의 금메달이 걸려 있는 당구에서 한국은 세계적인 수준에 오른 차유람과 김가영의 출전이 유력한 여자 포켓볼과 나인볼. 그리고 김경률의 남자 캐롬(스리쿠션) 등 3개의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내 빙상장 2층에 당구대 10개를 마련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당구대표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세대교체로 베이징의 참패를 넘는다!
레슬링은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올림픽 8회 연속 금메달이 무산된 것은 물론 메달이라곤 그레코로만형 55㎏급 박은철의 동메달이 유일했다. 룰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이 컸다. 대한레슬링협회는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대표 선발방식에 변화를 주고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2010 광저아시안게임은 체질개선에 들어간 한국 레슬링의 시험무대다. 코를 찌르는 땀냄새가 진동하는 필승관에 들어서 보니 선수들이 내뿜는 투혼의 열기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웠다. 박장순 자유형 감독은 “대표팀 진용이 어린 선수들로 대거 교체될 것 같다”면서 “세대교체를 통해 바뀐 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기술 레슬링으로 체질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방대두 그레코로만형 감독은 컴퓨터를 활용한 동영상 정보 분석에 여념이 없었다. “세계적인 선수들의 플레이 장면을 모두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통해 보관해뒀다”면서 “결국 상대에 대한 철저한 분석 없이는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레슬링의 과학화를 강조했다. 필승관 화이트 보드에는 베이징올림픽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한국 레슬링의 굳은 의지가 담긴 문구가 씌어져 있었다. “싸워서 이기고 지면 죽어라!’ “레슬링 선수가 되겠다는 초심을 기억하라!” 섬뜩한 격문이었지만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세계 최강 양궁의 비결
양궁은 한국이 세계 최강의 경기력을 뽐내고 있는 종목. 이유는 무엇일까? 선수들의 타고난 재능도 재능이겠지만 빅이벤트 대표 선발마다 투명성을 확보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는 대한양궁협회의 꼼꼼한 골든 프로젝트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이날 태릉선수촌 양궁장에는 광저우아시안게임 대표선발 5차 평가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 양궁의 시스템을 뿌리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이사는 “평가전에서 풀리그 토너먼트 싱글라운드 등 다면평가방식을 도입해 대표선수를 선발하고 있다. 선수 선발이 명성이 아니라 오로지 실력을 통해 이뤄지는 만큼 선수들은 대표선발이 확정될 때까지 긴장의 고삐를 놓을 수 없다”며 투명성이 뒷받침된 경쟁을 세계 최강 한국 양궁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꼽았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선수촌을 떠났다. 선수들이 쏟아낸 한말의 땀이 한섬의 환희로 되돌아올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의 신화가 기다려진다.

태릉 | 고진현기자 jhkoh@
출처 : 스포츠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