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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소식] [매거진S] 김경률, 이상천 넘어 한국당구의 전설로
작성일 : 09-10-01 23:06

[매거진S] 김경률, 이상천 넘어 한국당구의 전설로

● 당구장이 3류 공간이라고?

문을 열면 자욱한 담배연기가 코끝에 스미는 곳. 불량한 '동네 형'들의 집합소. 교복단추를 두 개쯤 풀어헤치고, 귀에는 담배 한개 비씩을 꽂은 형들이 육두문자로 소통하며 시간을 죽이는 곳. 그러다 살짝 울적해지면 사소한 시비로, 큐대를 들고서 패싸움도 벌이는 곳.

'당구장은 3류 공간'이라는 등식은 오랜 기간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해 왔다. 그래서 선생님과 학부모들은 "당구장은 학생이 가서는 안 되는 곳"이라는 의식을 끊임없이 전파했다. 과장과 왜곡 속에 당구장에 대한 흉흉한 전설들은 살을 덧붙여 갔다. 1994년, 당구장이 청소년에게 공식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때부터 당구장을 둘러싸고 상반된 기류가 흘렀다. "당구도 엄연히 스포츠"라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와 "그래도 탈선의 가능성이 있으니 학생은 출입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는 기성세대의 의견. 그 기성세대의 대부분도 학창시절, 부모와 선생님의 눈을 따돌려가며 큐대를 잡았다는 사실을 안 것은 한 참 뒤의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당구장에서 청소년을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던 법적인 시도가 당구장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 당구는 순종임금도 즐겼던 귀족스포츠

사실 당구는 귀족의 스포츠였다. 당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1607년,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에는 클레오파트라가 "당구장으로 가실까요?"라고 말하는 문구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혹자는 고대 이집트에도 당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당구와 유사한 형태의 스포츠가 발견된 적도 있다. 하지만, 현대적인 당구는 16세기 경 프랑스의 왕실 예술가가 고안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유럽의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널리 당구가 퍼졌다.

한국에 당구가 처음 수입될 때도 당구는 '그들만의 스포츠'였다. 당구는 1909년 일본을 통해 이 땅에 첫발을 내딛었다. '옥돌 대'라는 이름의 당구대 2대가 창덕궁에 최초로 설치됐고, 순종임금은 신하들과 함께 당구를 즐겼다. 1926년 경성신문사내 조선박문국에서 편찬한 '순종국장록'에는 순종임금이 궁중 내실에서 당구를 즐기는 사진이 포함돼 있다. 당시 순종의 당구 실력은 현재로 치자면 100-150점 정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당구장은 1920년대 남대문과 명동, 종로 등에 생겼다. 외국유학 시절 당구를 배운 부유층 자제들이 이용객의 다수. 당시 당구 몇 시간을 치는데 쌀 1가마니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부산 등 대도시에 하나 둘씩 당구장이 생겼지만, 해방 이후에도 당구는 70-80년대의 골프처럼 특권층만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였다.

● 당구키드들의 추억 "칠판이 당구대처럼 보여요"

당구장이 오명을 뒤집어쓰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50년대 중반, 국산당구대의 보급으로 당구장의 문턱이 일반인에게까지 낮아지면서 당구는 상품성을 갖게 됐다. 자유당 말기 깡패들은 수익성 높은 당구장을 장악하고, 당구장 보호 비 명목으로 금품을 강탈하기 시작했다. 내기당구를 종용하는 일도 잦았다. 이때부터 당구장이 '깡패들의 집합소'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달았다. 이후 무려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하지만 어른들이 뭐라고 하던, 그들은 당구장에 갔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뒤에 가기도 했고, 아예 '야자'를 당구장에서 하는 일도 빈번했다. 200이상인 친구들에게 '게임 비'라는 형태의 비싼 수험료를 지불하고 '야간에', '자율적으로' 당구과외를 받았다.

장시간 게임의 후유증으로 피곤한 눈을 비비던 다음 날 아침. 비몽사몽간에 마주한 아침 밥상은 당구대로, 반찬 그릇은 당구공으로 보인다. 등굣길 만난 친구들과 어젯밤 당구 게임을 복기한 뒤, 1교시에 본 초록색 칠판은 또 당구대의 모양. 짧게 깎아놓은, 친구들의 동글동글 머리통은 꼭 당구 공 같다. 이런 경험이 한 번쯤 있다면 당신도 한 때는 '당구키드'였던 셈이다.

● 한국 당구의 전설 故이상천 (1954-2004)

당구키드들의 영원한 우상은 단연 이상천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의 신기가 담긴 동영상을 찾아 헤매는 팬들이 많다.

전국당구대회에서 7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뒤 1987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상천은 불과 3년 만에 미국 내셔널 챔피언에 올랐고, 이후 2001년까지 무려 12년간 미국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이상천이 1990년부터 1994년까지 미국 국내대회에서 올린 41연승 기록은 윌리 호프가 1941년 세운 36연승을 무려 53년 만에 경신한 것이었다.

1993년 세계투어 성적을 종합한 랭킹에서 1위에 오른 이상천은 1994년 1월 벨기에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세계당구프로협회(BWA) 소속으로 미국과 스리쿠션의 본고장 유럽을 오가며 90년대 세계당구의 최고수로 군림했다. 1999년 <뉴욕 타임즈>는 이상천을 '스리쿠션계의 마이클 조던'이라고 소개했다. 압도적인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마이클 조던이 NBA의 중흥을 이끌었듯, 이상천이 침체 일로이던 미국 스리쿠션에 새 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상천은 야구의 박찬호(36)와 골프의 박세리(32) 이전에 미국 프로스포츠 무대를 사로잡은 최초의 한국인 스타였다.

미국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한국당구를 발전을 위해 복귀한 그는 2004년 6월 제4회 대한당구연맹 회장에 취임했지만 큰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2004년 10월 19일 위암으로 타계했다. 19일은 이상천이 떠난 지 5주기가 되는 날. 미국당구협회(BCA)는 2007년 그의 이름을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 그를 추모하는 '쌩리(SANG LEE) 인터내셔널 오픈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

● 김경률, '닮은 꼴 우상' 이상천의 뒤를 잇는다

2008년 10월, 수원에서 열린 스리쿠션 당구월드컵 결승. 김경률(28· 창해에탄올, 한국랭킹 1위· 세계랭킹 7위)은 결승에서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에게 세트스코어 2-3으로 아깝게 패했다. 한국 선수로서는 월드컵 첫 준우승. 이상천의 월드컵 우승 당시 국적은 미국이었다. 11월 수원에서 열리는 스리쿠션 당구 월드컵에서 세계정상에 재도전하는 김경률은 "이번에야 말로 우상인 고 이상천 회장님처럼 챔피언이 될 수 있는 기회"라며 웃었다. 아직 김경률이 '전설' 이상천을 따라가려면 갈 길이 멀지만 둘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닮은 꼴 ① 불과 3달 만에 당구 300을? "쳤던 공은 반드시 기억하라"

고수들도 어색한 손놀림으로 큐대에 초크를 바르던 시절이 있었다. 김경률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당구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대부분의 당구키드들이 그렇듯, 게임 비 걱정 없이 당구를 치고 싶은 친구의 꾐에 빠졌다. 첫 날부터 당구공이 끌려오고, 밀려나는 매력에 흠뻑 빠졌다. 그 길로 하루 6시간의 맹훈련.

당구를 치려면 돈이 든다. 김경률은 "그래서 본의 아니게(?) 부모님 속도 많이 썩혔다"고 했다. 경남 양산에서 식당을 하시던 김경률의 어머니. 김경률은 하교 길에 식당으로 향했다. "어머니, 제가 배달 갔다가 올게요."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이제 철들었구나' 싶었지만, 속셈은 다른데 있었다. 음식 값을 '가로채기'해 당구장으로 향했던 것. "그래도 3번 배달가면 2번은 어머니 드렸어요. 나머지 한번 정도만….(웃음)"

고등학교 3년 동안 김경률이 당구비로 쓴 돈은 1000만원을 헤아린다. 하지만 투자한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당구 입문 한 달 만에 100을 돌파한 김경률은 석 달 만에 200-300의 실력이 됐고, 1년도 채 안돼 400 이상을 쳤다. 김경률에게 당구를 전파한 친구의 표정은 점점 울상. "처음에는 제가 졌으니까 게임 비를 제가 냈지요. 하지만 얼마 안가서 역전됐어요. 그 친구도 나중에는 돈을 많이 썼을 거예요." 이미 고등학교 때 김경률은 점수는 측정이 무의미한 수준이 됐다.

10년을 넘게 쳐도 300을 못 치는 사람이 수두룩하지만 이상천 역시 불과 3달 만에 300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상천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수재. 고등학교 때도 큐대를 잡아보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당구에 빠진 것은 대학 진학 이후부터. 이상천 역시 이미 대학졸업 이전에 점수 측정이 무의미한 경지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선수의 실력이 일취월장한 비결이 부단한 훈련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남다른 재능 덕이기도 하다. 세계당구의 4대 천왕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토브욤 브롬달(스웨덴)은 "당구는 기억력의 스포츠"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제로 브롬달은 8개 국어를 할 수 있고, 5개 국어에 능통한 어학의 천재다. 당구에서의 기억력이 단어 암기력과 다른 점은 '정보가 아니라, 느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

김경률은 "경기를 하다보면, 갑자기 '이 공은 1년 전에 브롬달과 할 때 내가 쳤던 공인데…' 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고 했다. 그 때의 느낌 그대로 큐를 잡으면, 점수가 올라간다. 이상천 역시 마찬가지. 서울시당구연맹 허문범 부회장은 "(이)상천이 형은 워낙 머리가 좋고, 집중력이 좋아서 한 번 친 공은 절대 잊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닮은 꼴 ② 과감한 도전정신 "돈을 좇지 말고 꿈을 좇아라"

고등학교 때부터 프로선수를 꿈꿨던 김경률. 하지만 완고한 아버지는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시며" 말렸다. 군 제대 이후, 진로를 모색하던 김경률은 당구장 아르바이트부터 옷 장사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거친 시장 통은 정말 저랑 맞지가 않더라고요. 당구를 하고는 싶은데, 확신은 안서고…. 그러다가 운명 같은 경기를 보게 됐지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당구가 최초로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스리쿠션 결승은 이상천과 황득희(41)의 집안싸움. 예상을 깨고 금메달을 목에 건 황득희의 늠름한 모습을 보는 순간, 김경률의 머릿속에는 "이것이야말로 내 갈 길"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 길로 서울시당구연맹에 선수 등록을 했다.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이잖아요. 음지에 있던 당구가 양지로 나온 느낌이랄까? 그렇다면 내 인생을 걸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죠."

이상천의 도전은 더 무모했다. 명문대 졸업과 함께 안정된 생활이 보장돼 있었지만, 당구를 위해 자퇴서를 냈다. 80년대 초중반 명실상부한 한국챔피언으로 인정받고, 당구장도 몇 개 운영하며 자리를 잡을 무렵 그는 제2의 도전을 시작했다. "세계 무대에서 나를 평가 받고 싶다"며 1987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것. 이상천의 명성은 금세 미국 내에 알려졌고, 미국 당구 인들은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레이먼 클루망(벨기에)과의 초청경기를 주선하기에 이른다. 이 경기에서 대등한 기량을 선보인 이상천은 시드까지 배정받으며 유럽에서 열리는 그랑프리와 월드컵에 참가하게 됐다.

꿈을 좇은 대가는 저절로 돌아왔다. 이상천은 세계최고 수준의 상금과 개런티, 스폰서 비를 받았고, 대형 당구장 운영으로도 큰 수익을 냈다. 김경률 역시 마찬가지. 현재 김경률은 한국의 프로당구 선수 중 가장 몸값이 비싸다. 당구관계자는 "상금과 개런티, 스폰서 비 등을 모두 합치면 억대 연봉 수준"이라고 귀띔했다.

 

닮은 꼴 ③ 당구에 대한, 동료에 대한 예의를 갖춰라

자기가 열정을 쏟는 대상이 비하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쾌한 일. 김경률은 "TV에서 당구를 좋지 않게 묘사하는 프로그램이 나오면 기분이 나빠서 바로 꺼버린다"고 했다. 당구장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을 수 없이 봤지만, 그 모습이 싫어 평상시에도 담배는 입에 대지 않는다.

이상천은 2004년 대한당구연맹 회장 취임 직후, 당구장을 성희롱과 폭력의 장소로 묘사한 뮤직비디오에 대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준비하기도 했다. 당구의 이미지 쇄신에 앞장서겠다는 의지의 표현. 이상천이 생전에 '월간당구'에 기고한 글을 보면, "당구가 사랑받기 위해서는 당구 인들부터 직업의식을 가져야 한다"면서 "당구장에서 절대로 도박을 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후배들에게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 선배였지만, 경기장에 들어서면 누구보다 후배에게도 예의를 갖추는 선배였다.

김경률은 "2003년 이상천 회장님과의 생애 2번째 경기를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첫 번째 경기에서는 37-39로 뒤지던 이상천의 막판 대역전승(40-39). 하지만 2번째 대결에서는 이상천이 신예 김경률에게 완패를 당했다. TV에서만 보던 대 스타에게 거둔 승리에 얼떨떨했던 김경률. "어린 친구가 잘 치는 구나. 열심히 해라" 우상의 격려에 김경률은 이등병보다 더 큰 목소리로 "예, 알겠습니다"를 외쳤다.

승리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패배한 챔피언의 태도였다.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그 때 저도 생각했죠. 나도 나중에 정상에 오른 뒤 지게 된다면, 꼭 저렇게 하겠다고." 어느 덧 한국 최고의 선수로 성장한 김경률. 하지만 천하의 김경률이라도 항상 이길 수만은 없는 법이다. 김경률은 패배의 순간, 그 때의 챔피언을 떠올리며 전설이 남긴 유산을 대물림한다. 덕분에 김경률의 인기는 국내외 선수들에게 두루 좋다. 세계당구의 4대 천왕 중 한명으로 꼽히는 다니엘 산체스(스페인)는 김경률을 '형님'으로 모실 정도다.

닮은 꼴 ④ 당구에 왕도는 없다. 부단한 노력뿐

김경률에게 "팬들을 위해 당구를 잘 칠 수 있는 몇 가지 팁(tip)을 소개해 달라"고 하자, "당구는 부단한 노력 뿐"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도…", "아니요. 정말 특별한 게 없어요." 이번에는 더 무뚝뚝하다. 약간의 퉁명스러움에서 느껴지는 우직함. 그는 그냥 ‘자신이 살아온 대로’를 이야기할 뿐이었다.

서울시당구연맹 허문범 부회장은 "만약 (김)경률이가 세계챔피언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하루 6-8시간 큐대를 잡는 그. 체력 단련까지 더하면 훈련시간은 더 늘어난다. 하체 강화를 위해 야간에는 러닝까지. 어찌나 꽉 짜여진 일정대로 움직이는지, 일산의 모 클럽에서 훈련을 할 때면, '칸트의 일상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던 사람들처럼' 회원들이 김경률을 보고 시간 흐름을 짐작했다.

이상천 역시 미국으로 건너 간 직후에는 "밥 먹고, 자는 시간만 빼고는 큐대를 놓지 않았다"고 할 정도. 특히, 게임을 즐겼던 이상천은 상대만 있으면 24시간 이상 치는 일도 잦았다.

재능과 진지한 자세. 여기에 노력까지 결합하니 성적은 금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천양지차라는 아마추어와 프로. 하지만 김경률은 프로입문 1년 만에 전국대회 준우승을 차지했고, 만 2년 만에 대표선수로 선발되는 영광도 누렸다. 이상천 역시 미국 챔피언이 된 것은 이민 3년만이었다.

닮은 꼴 ⑤ 이기려고 하지 말고 즐겨라

2008년 10월, 수원에서 열린 스리쿠션 당구월드컵 결승. 세트스코어 2-2에서 5세트를 맞은 김경률은 초반 3-0으로 앞서나갔다. 마침 가장 자신 있는 포지션의 공이 나왔다. 순간, '여기서 몇 번만 더 치고 나가면 우승'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안으로 돌려치기를 하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힘이 모자라서 공이 마지막에 멈춰버렸어요. 승리가 보이니까 몸이 경직되고, 몸이 굳으니 결국 힘이 달린 거죠." 결국 전세는 역전됐고, 우승의 영광은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에게 돌아갔다.

1990년대, NFL 댈러스 카우보이스에서 공격수로 뛴 제이 노바체크는 "최고 속도로 뛰는 것보다 90%로 뛰는 것이 더 빠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온 몸에 힘이 과도하게 들어가면, 최고 수행을 방해하는 저항 근의 작용도 커지기 때문. 당구도 마찬가지다. 승부에 몰입이 커져서 과도한 긴장을 하게 되면, 오히려 평소의 '손 맛'이 사라진다.

김경률은 "그 때 준우승을 하면서 값진 것을 배웠다"고 했다. '경기를 꼭 이기겠다는 마음보다, 당구를 처음 시작할 때의 설렘으로 일구 일구를 대하는 것' 그것이 마인드 컨트롤의 비결. 김경률은 "야스퍼스 같은 선수도 사실 자세와 브리지, 스트로크 등 기술만 놓고 보면 세계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면서 "하지만, 정신력이 강하기 때문에 세계 정상을 유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전설' 이상천 역시 긴박한 상황에서도 창조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배짱'이 있었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경기를 즐긴다는 증거였다. 역설적으로 그런 자세 덕에 승리를 쌓을 수 있었다. 가끔씩 후배들이 "왜 (긴박한 상황에서 정석 플레이 대신에) 그런 샷을 치셨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거? 그냥, 그냥 한 번 쳐봤어." 이상천은 "호기심을 갖고, 새로운 길을 연구해야 발전이 있다"고 본인이 강조한대로 당구인생을 살았다.

● 닮은꼴 릴레이의 대미는 김경률의 세계 정상 등극
'이상천과 김경률은 누가 더 강할까'

김경률은 한국 당구계가 인정하는 이상천의 대표 후계자. 당구 인들은 '둘 중 과연 누가 더 강한가'를 놓고,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커리어 면에서 아직 김경률은 이상천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의견과 '80, 90년대 국내 당구 수준과 현재의 국내 당수 주준은 격차가 크다. 실제로 에버리지(한 큐에 스리쿠션을 성공시키는 평균)는 김경률이 높다'는 것이 의견이 대척점에 서 있다. 현재 김경률의 에버리지는 약 1.5에서 1.8사이.

서울시당구연맹 허문범 부회장은 "이상천의 에버리지가 약간 낮지만, 그것은 세계정상급 선수들과의 대결에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면서 "둘 사이에 멋진 대결이 펼쳐졌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며 웃었다. 둘은 이상천 생전에 2번 맞붙어 사이 좋게 1승1패를 나눠가졌다. 하지만 당시 이상천의 나이는 전성기가 다소 지난 40대 후반. 김경률 역시 프로에 입문한 직후(2003년)였으니, 당구 실력이 물오르기 전이었다.

이런 비교에 대해 김경률은 "이상천 회장님과 나란히 언급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반응이었다. "저는 아직 월드컵 우승도 못했고, 아시안게임 금메달도 못 땄습니다. 일단, 하나하나씩 쌓아가야 이 회장님의 업적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겠지요. 우선, 11월 수원 월드컵에 집중하겠습니다. 2006도하아시안게임에서 4강에서 탈락했기 때문에 내년 아시안게임도 욕심이 납니다." 김경률은 '세계 정상 등극'으로 이상천과의 닮은꼴 릴레이에 대미를 장식할 심산이다.

● 김경률의 추석 "이번 추석에는 아버지와 함께 당구 한 게임 칠래요"

"엄마 말 안 듣고 당구 친 애들인데 당연히 고집이 있지." 故이상천이 대한당구연맹회장 재직 시절, 선수 관리의 어려움을 호소하던 직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다. 김경률도 그랬다. 엄마 말 안 듣고, 부모님 눈을 속여 가며 큐대를 잡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학창시절 어머니는 이미 아들이 당구 비 마련을 위해 딴 주머니를 차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없이 아들을 바라보기만 하던 어머니.

김경률은 2001년 아마추어 동호인 대회에서 1등을 하던 날을 잊지 못한다. 프로대회 우승보다 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 때 1등 상품이 김치냉장고였어요. 김치냉장고가 모든 어머니들의 로망이던 시절이거든요. '우리 아들 장하다'며 어깨를 두드려주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네요."

학창시절 당구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시던 아버지까지도 이제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아들이 TV중계방송이라도 나올 때면 "술사라는 사람이 많아 골치 아프다"며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리는 아버지. 김경률은 "그래도 요새는 내가 벌이가 괜찮으니 소주 값은 넉넉히 드린다"며 웃었다.

지난 2년간, 김경률은 추석 때도 경남 양산 고향집에 내려가지 못했다. 국내외 크고 작은 경기 일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 해는 27일 끝난 제1회 유니버셜 배 서울오픈 스리쿠션 전국당구대회 우승이라는 값진 선물과 함께 양산으로 향한다.

"이번 추석 때는 아버지와 함께 당구도 한번 쳐보고 싶어요. 아직 한번도 같이 쳐 본 적이 없거든요. 아버지는 150-200정도 치시는데, 그 정도면 한창 재밌게 치실 때죠.(하하) 팬 여러분들도 당구와 함께 건전한 추석 연휴를 보내시면 어떨까요. 아이들의 공간 지각 능력 향상에도 도움이 된답니다."

특히 경남 양산이 고향인 팬이라면, 가족들과 함께 당구장을 찾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운이 좋다면, 세계 최고 수준의 당구 묘기를 동네 당구장에서 보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나쁜 짓' 한다며 아버지로부터 구박받던 아들. 이제 장성한 아들이 '한국 최고의 당수선수'라는 명함을 달고 귀향한다. '아들에 대한 인정(認定)'의 의미가 담긴 부자간의 대결. 흰색, 노란색, 빨간 색 공들은 부자간의 정을 담아 사각 당구대 안을 오밀조밀 움직일 것이다. 어쩌면 그 경기가 김경률 개인적으로는 월드컵 결승만큼이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